책이야기/출판

『함께 가자, &GO ―충북 NGO 활동가의 삶과 희망』

바탕~ 2014. 11. 1. 14:36

충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민간단체 활동가 12명의 삶과 희망을 살펴보는

함께 가자, &GO ―충북 NGO 활동가의 삶과 희망』

 

충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민간단체 활동가 12명의 삶과 희망을 살펴보는 책. 언론에 나오는 딱딱한 활동이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와 꿈에 대해 인터뷰로 풀어내었다.

 

12명의 충북지역 NGO 활동가

김의열: 솔뫼유기농업 영농조합법인 총무

김진우: 제천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박종관: (사)충북민예총 이사장

신제인: 전 생태교육연구소 터 소장

안건수: 이주민노동인권센터 소장

양준석: 행동하는복지연합 사무국장

엄승용: 청주KYC 대표

이두영: 전 충북청주경실련 사무처장

이선영: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

이수희: 충북민언련 사무처장

조광복: 청주노동인권센터 노무사

황민호: 옥천순환경제공동체네트워크 상임위원장

 

서명│ 함께 가자, &GO ―충북 NGO 활동가의 삶과 희망

저자│ 김정미 송재봉 오윤주 이재표 주영민 육성준

출판사│ 도서출판 직지

출판일│ 2014. 10. 16.

정가│ 15,000원

면수│ 248면

판형│ 150×225mm

ISBN│ 978-89-89011-87-3 03330

│CIP│ (CIP제어번호 : CIP2014029160)

표지

 

 

작가 소개

 

이재표: 마을신문 네트워크 청주마실 대표

라디오 방송, 지역 사사 주간지, 마을신문 기자 등 주변부 언론에서 일했으며, 세상의 변두리에 희망이 있다고 믿고 있다. 김의열, 양준석, 이선영 편을 썼다.

 

오윤주: 한겨레신문 기자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며,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이 되려고 힘쓰고 있다. 이두영, 안건수, 이수희 편을 썼다.

 

김정미: 중부매일 기자

소외된 것들에 깊은 시선을 보내고 거짓을 앞세우는 일들에 날선 비판을 보낼 줄 아는 가슴 뜨거운 기자를 희망한다. 황민호, 엄승용, 조광복 편을 썼다.

 

주영민: 충청투데이 기자

이제 2년차에 접어든 기자 초년생.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시민·사회·노동단체에서 활동가를, 바뀌는 세상을 전하고 싶다면 기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진우, 박종관, 신제인을 만났다.

 

육성준: 충청리뷰 사진기자

15년 넘게 직업사진가로 살면서 아직도 가장 어려운 사진은 인물 사진이다. 12명의 활동가들과 인터뷰 내내 함께 했다. 이들의 내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송재봉: 충북NGO센터장

20년 넘게 시민사회 현장에서 건강한 사회, 협동하는 지역 사회를 꿈꾸고 있다. 충북시민운동 약사 편을 썼다.

 

 

머리말

 

발간사

정체된 지역사회에 변화와 생명의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충북지역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NGO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어 무엇보다 기쁩니다.

문득 NGO 활동가는 경쟁과 탐욕의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경쟁과 효율, 더 많은 권력과 이윤 추구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살아남기 어려운 철학과 삶의 태도를 가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NGO 활동가는 ‘일과 삶이 일치되어 있는 사람, 직책에 관계없이 모든 권한과 책임과 의무를 다 가지는 사람, 한 기능만을 잘 수행하는 기능인이 아니라 지역사회 변화 설계자, 행동가, 조력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사람, 주어진 일만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협력하는 일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등장한 12인의 활동가들이 바로 이런 활동가 상에 가장 부합하는 이들이 아닐까 합니다.

지역사회 변화를 위해 헌신해 온 NGO 현장 활동가들은 어떤 고민을 하면서 현재의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지, NGO 활동을 통해 꿈꾸는 미래의 삶과 지역의 비전에 대한 12인 활동가들의 진솔한 대화 내용입니다.

이 책을 통해 지역민들은 지역 NGO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신뢰를, 새롭게 시작하는 NGO 활동가들에게는 앞서서 고민하고 실천한 선배 활동가들로부터 성공과 실패와 좌절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지역 NGO 활동가들의 삶에 대한 정당한 사회적 가치 부여로, 또 다른 시민과 청년들이 시민운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2014년 10월

송재봉 충북NGO센터장

 

 

 

목차

 

발간사……2

추천사……4

 

시민운동의 보루에서

세종시, 균형발전, 그리고… | 이두영……14

“평생 시민운동가로 살래요” | 이선영……32

 

코뮌의 부활

괴산농부가 연주하는 달빛소나타 | 김의열……46

사회적 경제와 옥천 코뮌 | 황민호……58

 

예술, 언론 그리고 삶

30여 년 충북 진보운동 역사의 나이테 | 박종관……74

신문 읽어 주는 수희 씨 | 이수희……90

 

행복의 척도를 묻다

짜이를 끓이는 남자 | 양준석……108

소셜 디자이너 꿈꾸는 청년활동가 | 엄승용……120

 

차별을 향한 정직한 분노

이주민 노동자의 벗 | 안건수……134

인권은 경계를 가르지 않는다 | 조광복……152

 

자연에 바치는 위로와 헌사

되살아나고 있는 청주 환경지킴이 | 신제인……170

‘눈물 많은 무당’ 시민활동가 | 김진우……190

 

충북 시민운동 약사

아름다운 변화를 위해 전진해 온 충북 시민운동의 발걸음 | 송재봉……215

 

본문 미리보기

 

이두영∣ 충북경제사회연구원 원장, 충북청주경실련 전 사무처장

세종시, 균형발전, 그리고…

 

봄이 왔다. 청주의 봄은 무심천으로 온다. 개나리 피고 실개천에 버들개지 망울 터뜨릴 무렵 벚꽃이 팝콘 터지듯 무심천변을 뒤덮는다. 벚꽃 송이만큼은 아니어도 봄맞이 하려는 이들이 무심천을 덮으면 청주는 비로소 봄이 된다. 무심서로 4층 건물에서 바라보는 맞은편 무심동로 벚꽃과 개나리가 취하도록 흐드러진 모습은 그야 말로 장관이다.

청주의 상춘을 20년 동안 무심천 언저리에서 지켜봤던 이가 봄이 오자 훌쩍 떠났다. 개나리도, 벚꽃도 피기 전에 봄 편지 한 장 남기고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십 수 년을 ‘경실련 이 처장’으로 불려온 충북청주경제실천연합 이두영(48) 사무처장이다. 이젠 ‘전’(前)을 붙여야 하지만 여전히 등식처럼 따라 다닌다. 20년 세월보다 그가 남긴 발자취가 그렇게 하고 있다.

겨우내 추웠던 이들에게 봄을 전했으니 이제 좀 따뜻한 볕 누리며 쉴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날갯짓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경실련 20년을 갈무리하는 글을 구상하고 있으며, 평생의 업이라고 입버릇처럼 들고 사는 지방 분권, 균형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또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봄을 전하려나 보다.

 

또 하나의 약속

그는 ‘삼성맨’이었다. 그것도 당대 최고의 직장으로 불리는 삼성전자의 사원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1982년 12월 4일 그는 공채로 입사해 생산기술연구소에서 일했다. 청주기계공고에 다닌 그는 그저 그런 ‘공돌이’가 아니라 공부를 잘했으며, 학교에선 담배조차 입에 대지 않는 나름(?) ‘범생’이었다.

하지만 삼성이 그에게 준 것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따뜻함이 아니라 상실감이었다.

“당시 청주공고에선 삼성에 100명이 지원해 2명만 합격했다. 학교에선 다시는 삼성에 보내지 않겠다고 항의해 10여 명이 추가 합격했다. 하지만 대구·경북·부산 등에선 100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상 지역 할당제가 존재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고교생에겐 충격이었다.”  입사 뒤에도 차별은 있었다. 정치세력이 강한 지역의 출신들은 노른자위 부서에 있는 선·후배들이 밀고 당겨 주며 자신들만의 패권을 형성했다. 연구소 안 고졸 공채 출신 모임 ‘한마음회’의 총무를 맡아 보던 그는 자신만이 아니라 정치적 열세지역 출신 모두 비슷한 피해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부를 해 행정고시에 도전하려고 방송통신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이 또한 방해했다. “야 여긴 워낙 바쁜 데야. 대학은 무슨….”  자연스레 불만이 쌓여갔다.

그가 일한 곳은 금형과 자동화기기를 연구하고 제작하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금형이 ‘마찌꼬바’라는 일본말이 더 익숙한 소형 간이 공장에서 이뤄졌었는데, 이를 삼성전자에서 처음으로 현대화·자동화를 시도하는 단계였다.당시 고교 졸업과 함께 취업된 노동자들은 이름 대신 ‘어이’, ‘야’, ‘꼬마야’ 등으로 불리곤 했다. 당시 고참 들은 펜치, 스패너 등 공구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험악한 분위기에서 기름때를 묻혀가며 힘들게 기술을 배웠노라고 자랑스럽게 무용담을 펼치던 시절이었다.

그가 분임 토의 등을 통해 이런 관행의 시정을 요구한 끝에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등 현장 분위기가 개선되기도 했다.

인사상 불이익, 비인간적인 현장 처우와 분위기, 진학조차 막는 노동 구조 등은 삼성이라는 기대감을 상실감으로 바꿔 놓았다. 그가 생활하던 자취방은 수원 아주대 앞에 있었다. 1987년 당시 거의 날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가 울려퍼지던 시절이었다. 방송통신대 경기지역 학습관 행정학과 학회지 ‘점과 선’ 편집위원으로도 일하며 조금씩 세상에 눈떠 가던 시기였다. 그는 결국 1987년 5월 30일 삼성에 일방적으로 이별을 알렸다. 그는 아팠지만 삼성도 아팠으려나 1984년 2차 오일쇼크 탓에 봉급이 동결돼 또래 공무원들이 10만 원 안팎을 받을 때 본봉 18만~20만 원, 야근·특근 수당을 더해 30만~40만 원씩을 안기는삼성이었지만 그의 마음을 잡지는 못했다.  

“참 정 붙이기 어려운 직장이었어요. 겉으론 월급 많이 주고 반듯한 듯 보였지만 속으론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게 많은 첫 직장이었죠.” 꿈 많던 시절 삼성에서 꿈을 이루지 못한 그는 서울로 향했다. 세상을 보고 싶었다. 대선이 한창이었다. 당시 서울은 시청, 서울역, 보라매공원 등 가는 곳 마다 유세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백기완 선생의 후보 사퇴 연설 현장에도 있었다. 하지만 야당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살길을 찾아야 했다. 청주에 내려온 그는 1989년 3월 한국야금에 입사했다. 당시 한국야금 역시 고임금에다 기술집약적 사업체로 인기가 좋았다. 입사 1년여 만에 노사협의회 근로자 쪽 대표위원을 지낸 그는 이듬해 노동조합 결성과 함께 교육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삼성은 차마 버리고 나왔지만 이제 노동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열심히 활동했다. 회사는 그게 싫었다. 결국 결혼을 3개월 앞둔 1992년 5월 해고 조처가 내려졌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한겨레> 기자였던 권혁상 <충청리뷰> 편집국장, <주간 노동자의 신문> 기자로

활동하던 고 정진동 목사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기나긴 복직 투쟁을 시작했다. 당시 한일 합작 자본 형태로 운영되던 회사의 사장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복직 불가”라는 태도를 보였다. 회사 내부적으로 노조의 뒷받침도 여의치 않았다.  

또 다른 강적도 버티고 있었다. 당시 ‘최틀러’로 불리던 최병렬 노동부장관이었다. 강성 보수 노동 정책의 상징으로 불리던 그는 1991년 10월 4일 국정감사장에 나와 “노사분규 가운데 폭력행위는 불법·합법 파업을 가리지 않고 노조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도록 강력하게 지도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반노동정책을 폈다. 결국 접어야 했다. “끝까지 해볼 생각이었는데 세상도 나를 외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복직 뒤 자진 사퇴하는 형식으로 해고 문제를 마무리했죠.” 최병렬은 조선일보 정치부장, 편집국장을 거쳐 국회에 입성한 뒤 문화공보부·공보처장관, 서울시장에 이어 새누리당 고문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인 7인회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생명력이 긴 정치인이다.  

마무리는 참으로 아쉬웠다. 그때 그렇게 끝나지 않았으면 지금도 노동운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한주전자의 이인영 홍보부장, ‘노동자의집’ 박만순 대표 등과 지금의 민주노총 전단계랄 수 있는 전노협 연계 운동을 하는 등 지역 노동운동의 틀을 다지는 중이어서 더욱 아쉽기도 했다. 민주노조진영은 1992년부터 본격적인 연대사업과 중간 간부 육성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경실련에 몸담으면서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게 됐는데 한편으론 아쉽고,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네요. 노동에게….”

『충북민주화운동사』는 “사측은 이두영이 조합 간부교육에 전노협 이진숙을 초청하는 등 조합 활동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자 울산영업소로 발령 냈다.(중략) 노조는 성공적인 임·단협을 진행했지만 이두영 교육선전부장의 복직은 확보하지 못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또 다른 시민과 약속을 위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경실련과 함께 한 20년

크리스마스에 한국야금에서의 적을 정리하고 이틀 뒤 경실련을 만났다. 1993년 12월 26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연방 나라에서는 이날을 ‘박싱데이’라 부른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이날 역시 휴일로 정해 상자(박싱)에 선물을담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한다는 날이다. 백화점 등에서는 대규모 세일을 하고,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이때 팬들을 위해 경기를 선물하기도 한다.  이후 자신의 20년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듯 살아온 그 이기에 박싱데이에 청주경실련 창립준비과정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경실련 입문에 잊을 수 없는 이는 이주형 전 청주노동문제상담소 사무국장과 정기호 변호사다. 이 전 국장은 한국야금 복직 투쟁과 해고 무효 확인소송 때 도움을 줬고, 정 변호사는 무료 변론을 해줬다. 정 변호사 사무소의 김강일 사무장의 누나가 경실련 초대 공동 대표를 지낸 손봉호 교수의 열렬한 팬이었고 김 사무장 또한 경실련 활동을 권유했다.  

“경실련 참여는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타의반은 이주형 선배의 교묘한 포섭 작전에 말려든 셈이고, 자의반은 나 자신이 추구하던 운동 방식과 맞았다.”

1989년 7월 출범한 경실련은 당시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받으며 영향력이 커지는 전성기였다. 그는 평화적, 합법적, 실사구시의 합리적 대안제시 등 경실련이 지향하는 운동방식과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민주복지사회 등 경실련이 추구하는 목적에 공감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원으로 참여하거나 공개적으로 후원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였으며, 속으론부침을 거듭하던 배고픈 시절이었다.

청주경실련은 1994년 1월 19일 사무실 개소식, 2월 22일 발기인대회, 4월 16일 창립총회 등을 거쳐 숨 가쁘게 출범했다. 하지만 그해 하반기에 이주형 초대사무국장이 비상근으로 돌아서고, 머지않아 사무실마저 비워준 채 당시 <충청리뷰> 사원휴게실에 더부살이를 할 정도로 어려운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활동비가 20만 원이었다. 어느 날 경실련 청년회에서 그를 불렀다. “너마저 그만두면 경실련 간판을 내려야 한다. 후원금을 모아 다달이 지원할테니 넌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먹먹하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초창기 주로 회원조직을 만들고 활성화시키는데 주력했지만 IMF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대량 실업사태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충북지역실업극복시민사회단체협의회를 제안해 사무국장을 맡았고, 청주시인력관리센터를 수탁 받아 실업극복종합지원센터로 활용했다. 새벽부터 무료급식, 구인구직알선, 생계비지원, 무료진료, 사랑의 쌀 모으기 운동 등의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늘 현안과 사건 속에서 살았다. 이주형 초대 사무처장이 갑자기 학교로 발령받아 가는 바람에 사무처장직을 물려받아 총선시민연대 낙천낙선운동, 수도권규제완화반대운동, 국가균형발전운동, 지방분권국민운동, 호남고속철도오송분기역 유치운동, 하이닉스반도체살리기 및 제2공장 유치운동, 신행정수도 원안사수 및 지속추진운동, 세종시 원안사수 및 정상추진운동, 대형마트 및 SSM저지운동,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운동,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원안사수 운동,청원청주통합운동 등 주요현안을 맡아 해결해 왔다.  

그와 지방분권, 균형발전은 동일체다. 그의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은 역시 2003년 12월 29일 오후 5시 30분께 지방살리기 3대 특별법(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지방분권특별법,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당시 경실련은 누리집에 이례적으로 별 4개를 표시하며 국회 표결 상황까지 실었다. 지방분권특별법은 재석의원 193명, 찬성 187, 반대 2, 기권 4,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은 재석 203, 찬성 172, 반대 27, 기권 4, 신행정수도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은 재석 194, 찬성 167, 반대 13, 기권 14 였다. 지방 살리기 3대 특별법 통과 뒤 나온 ‘지역균형발전과 민주적 지방자치를 위한 지방분권국민운동’의 성명은 명 성명서로 꼽히고 있다.  

“지방살리기 3대 특별법은 ‘서울공화국과 그 식민지’에 종말을 고하는 획기적 계기가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중앙집권 국가로부터 지방분권 국가로 거듭나게 하는 제도적 기반이 될 것입니다.(중략) 지방 살리기 3대 특별법의 제정은 지방분권국민운동의 승리이며, 지방자치단체의 승리이며, 지방민의 승리이며, 법

제정을 실현시킨 16대 국회의 승리이며, 나아가 지방과의 상생발전에 기꺼이 동의한 수도권 주민의 승리이며, 온 국민의 승리입니다.”  

당시 이 법의 통과를 위해 전국 각 지역 각계 지식인 3,000명이 ‘지방분권 실현 전국 지역 지식인 선언’을 했고, 지방분권 국민운동 등은 17대 대선 후보 3명 한테서 ‘지방 살리기 입법화와 지방분권 10대 의제 대국민협약’을 받아냈으며, 전국 각 지역주민 1만여 명이 참여한 ‘지방 살리기 3대 특별법 제정촉구 국민대회’, ‘지방 살리기 3대 특별법 연내 제정 촉구 1천만 지방민 선언’ 등을 이끌어냈다.  

“전국의 시민사회단체가 모든 역량을 결집해 2000년부터 노력을 기울였다. 충북이 주력군 역할을 했다. 당일에도 충북은 버스로 상경해 국회를 압박했고 법안이 통과한 후 국회 본관 앞에서 지방 살리기 3대 특별법을 하나씩 호명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가장 감격적이었던 순간이었다.”  또 하나 보람 있었던 일은 역시 수도권 규제 완화 반대운동을 국가 균형 발전운동으로 승화시켜 ‘지역 균형 발전과 민주적 지방자치를 위한 지방 분권 국민운동’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지방 살리기 운동으로 세종시·혁신도시 건설, 지역 언론 살리기, 지방대학 살리기 등이 노무현 정부의 국정운영 철학과 정책으로 추진됐다.

하나 더 꼽는다면, 삼전사기로 이룬 청원·청주 통합이다. 그는 지금도 청원·청주통합시민협의 사무국장과 통합 추진위원을 맡아 통합의 틀을 다지고 있다. 아쉬움도 있다. 신행정수도 건설이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이다.  늘 법, 정부, 정권 등 권력과 싸우면서 그가 토해내는 논리 정연한 말과 글 또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때론 격정을 토할 때도 있다.2010년 이명박 정권의 세종시 수정안 국무회의 의결에 맞서 그는 하늘을 끌

어들였다.

“이명박 정권은 더 이상 민심과 역사적 흐름을 거역하지 말고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해야한다.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행정부가 수없이 논의하고 결정해 추진하고 있는 국민적·사회적 합의사항을 뒤집는다면 하늘도 무심치 않아 반드시 천벌을 내릴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당장 국민에게 사죄하고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할 것을 천명하라.”

당시 이명박 정권은 모든 권력과 행정력을 동원해 세종시 백지화에 혈안이 돼 있었고 그 또한 온힘을 다해 이를 막았다. 경실련 안에서 조차 “편집증 환자처럼 집착한다.”는 말로 그를 비판할 정도였다. 

“지나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네요. 제가 좀 그래요.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거죠. 어쩌면 단순하면서도 상식적인 것을 말하는데, 논리적이면서도 도덕적인 것을 내세우는데, 그쪽에서 자꾸 몰상식으로 흐르면 참을 수 없죠.”  

 

“아빤 왜 자식을 저렴하게만 키우려 해”  

그는 지난 20년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을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시민운동에 전념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시민운동가, 경실련 회원,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고 의미가 있었다. 천도교에 심취했던 그는 평소 ‘도를 주체로 삼고 가사를 객체로 삼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활동했다. 사실상 개인 삶과 가정은 등한시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가족은 동갑내기 아내 이복철(48) 씨와 새날(22)·한동(20) 남매다. 남매는 공교롭게도 충북대 경제학과에 다니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이 아닐까?  

아내는 운명적으로 만났다. 삼성에 다닐 때 묵었던 수원시 중구의 다세대 자취방에 아내와 언니가 함께 살고 있었다. 동갑내기 선남선녀가 친하게 지낼 법도 했지만 둘은 애써 외면했다. 외려 훗날 처형이 된 언니와는 말도 섞고, 음식도 나눠 먹을 정도로 흉허물 없이 지냈지만 유독 둘만은 알은체 정도만 하고 내외하듯 지냈다. 그나마 그가 이사를 하면서 잊고 지냈다.

어느 날 우연히 자취방에 들른 그는 아내를 봤다. 언니가 곧 결혼한다는 말을 나눈 뒤 말문이 터졌다.

결혼식에 다녀온 뒤 몇 번 더 만나다가 그가 용기를 냈다. “우리 데이트 할까”, “응.” 수원 화성을 함께 거닐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칠석이었다. 저녁엔 영화를 봤다. ‘레이디호크’. 신앙과 마법이 공존하던 중세 유럽 한 성을 지배하던 추기경(악마)은 미녀 이사보(미쉘 파이프)를 맘에 두지만 그녀는 추기경의 경호대장(룻거 하우어)을 사랑한다. 사랑에 눈멀어 화가 난 추기경은 이자보를 낮에 매로 변하게 하고 니바르는 밤이면 늑대로 변하게 마법을 건다. 둘은 낮과 밤이 바뀔 때 잠시 서로의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마법을 풀어 행복하게 잘사는 그런 내용이다.

둘은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 레이디호크처럼 사랑을 나눈 끝에 1992년 결혼했다. 영화 같았다. 새해 첫날 극심하게 결혼을 반대하던 장인으로부터 천신만고 끝에 결혼 승낙을 받았으나 결혼 날짜를 받자마자 5월에 해고됐고, 해고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다. “둘 다 말띠니께 풀이 무성할 때 결혼해야 잘 먹고 사는 겨.” 장인의 말을 듣고 중복과 말복 사이인 8월 1일 한낮에 비지땀을 흘렸다. 그리고 10월에 새날이 왔다. 속도위반이었다.

그는 늘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여느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그랬듯이 가족에게 보다 시민들에게 시간을 내줬다. 간호사였던 아내는 딸에 이어 아들이 태어나자 일을 접었다.

한번은 딸이 “엄마 아빠는 왜 자식을 저렴하게만 키우려고 해? 우리 집처럼 저렴하게 키우는 집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라고 해 웃었다. 하지만 가슴 한편으로는 짠했다.

단 한 번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2004년 8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년 동안 안식년을 받아 미국 미시간 주립대에서 국제전문인 과정을 수료할 때였다. 경실련 10년 활동과 각종 지역현안 해결에 대한 보상 성격이었다. 충북경실련과 지역사회의 후원도 있었다. 하지만 한 지방 언론에선 ‘재갈 문 시민단체’란 제목으로 비판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잘못된 지원이었고, 호화 유학이라는 내용이었다.  

“참 어이없었죠. 지방살리기 3대 특별법에 매달려 있을 때 예전에 수술한 중이염이 재발됐지만 국회상황실장을 맡아 일하느라 한시도 쉬지 못해 완전 탈진상태였죠. 그래서 특별법 통과 뒤 곧바로 수술하고 건강 회복을 위해 쉬려할 때 이상훈 충북지역개발회장을 등 지역사회의 원로와 대표들이 앞장서서 유학비를 도와줬죠.”  

그에게 미국 유학은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는 그때 지역혁신에 심취해 있었다. 노무현 정부의 지역균형발전 정책 가운데 지역혁신운동에 관심이 있었고, 특히 북미지역 성공 사례를 눈여겨 봐 왔다.

그의 주 관심사는 북미 지역 지방 대학이 어떤 형태로 지역과 연계하고 있으며, 또 어떤 방향·방법으로 지역 혁신을 이끄는지를 토론과 현장 공부를 병행하면서 연구했다. 미시간 주립대는 물론 미시간대, 캐나다 맥길대, 스탠포드, 하버드 등을 찾아 사례를 연구했다.  

엔지오 활동가들의 재충전과 교육 프로그램 마련도 고민했다. 그때 함께 공부하던 서왕진 서울시 비서실장, 박진원 한겨레 통일문화재단 사무국장, 이태일 환경연합 처장 등과 ‘성찰과 배움’이라는 한국 사회 중견 활동가 재충전 프로그램 기획 논의를 하기도 했다. 그때 스탠포드에 있던 박원순 서울시장을 찾아가 마침 함께 있던 스탠포드의 신기욱 교수, 성공회대의 조희연 교수 등을 함께 만나 제안을 했으며, 뒤에 박 시장 등의 주도로 포스코 청암재단에 ‘엔지오 펠로십’이라는 활동가 지원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 임길진(1946~2005) 박사는 잊을 수 없다. 미시간주립대 국제대학원으로 그와 활동가들을 초청하기도 한 임 박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기 전까지 중견 활동가들의 양성과 교육, 지원에 힘썼다. 임 박사의 유족 등은 2006년 그의 유산 등으로 시민사회 활동가 양성을 위한 ‘임길진 스쿨’을 만들었다.  

“임 박사의 유품을 제가 가지고 돌아왔는데 참 아까운 분이었어요. 엔지오 활동가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임 박사 같은 분은 정말이지 훌륭한 일을 했고, 그 영향으로 많은 이들이 더 나은 활동을 하는 동기 부여가 되고 있어요.”  

가족에게도 좋은 시간이었다. 명절 때 가족 친지, 고향을 찾는 것 빼고는 변변한 여행 한번 제대로 누리지 못했지만 원 없이 여행을 했다. 방학 때마다 차를 이용해 미국을 돌았다.

일에 쫓겨 면허증조차 없던 그는 가족을 위해 미국에서 면허증을 땄다. 그야말로 왕초보였지만 용감했다. 허름한 밴을 구입해 화물칸에 압력 밥솥, 텐트, 먹을거리 등을 채워 어디든 갔다.

가을엔 나이아가라와 미국 북동부, 겨울엔 플로리다 등 동부, 여름엔 멕시코 국경 마을까지 차로 달렸다. 그때 미국 애틀랜타에 머무르고 있던 정은경 청주YWCA 총장은 그와 가족을 보고 “원 세상에 난민도 이런 난민은 처음이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라고 묻기도 했다. “초보 운전에 왕초보 미국 여행이다 보니 사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기기도 했지만 사실상 가족들과 함께한 첫 여행이다 보니 참 좋은 시간이었지요. 내 인생에서 가족에게 떳떳했던 유일한 순간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