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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요가의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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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제부터 요가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한다.
'요가'yoga라는 말은 '결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 '(소나 말에) 멍에를 씌우다'라는 뜻의 yoke는 산스크리트어의 요가에서 온 말이다. 따라서 요가란 육체와 정신 또는 신과 인간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방법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요가는 유한한 현상 세계의 배후에 있는 실재, 즉 神性과 결합하기 위한 여러 방법 중에 하나이다. 완전한 요가의 상태에 도달하면 神性과 합일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신비적인 결합'이라는 말로 요가와 비슷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요가 수트라>의 주석가 중에서 고전적인 인물인 보자(Bhoja)는, 파탄잘리가 쓴 요가라는 말의 개념을 '참 나가 아닌[非眞我] 현상 세계에서 참 나[眞我]인 실재를 떼어 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요가 수행자를 요기yogi라고 부른다.
'가르침'이라고 한 것은, 파탄잘리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어떻게 요가를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철학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말만으로는 인생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다. 실제적인 수행이 없이는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1-2. 요가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는 것이다.
파탄잘리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마나스manas, 붓디buddhi, 그리고 아함카라ahamkar라고 하는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마나스는 감각 기관을 통해 외부 세계에서 받아들인 느낌을 모아 두는 속성을 가리킨다. 붓디는 그 느낌들을 분류하여 어떤 특정한 느낌에 대해 특정한 반응을 하도록 구별하는 속성이다. 아함카라는 어떤 느낌을 받는 것도 '나'이며 그러한 여러 가지 느낌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것도 '나'라고 생각하는 에고의식을 말한다. 예를 들면, 마나스는 '어떤 살아 있는 큰 물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이때 '저건 몹시 화가 나서 누군가를 공격하려고 달려오는 황소로구나'하고 붓디가 재빨리 판단한다. 그러면 아함카라는 '나를 받으려고 달려오는 거로구나'하면서 비명을 지르고 달아난다. 화가 난 황소를 본 것도 '나'이고, 놀란 것도 '나'이며, 도망간 것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함카라의 작용이다. 잠시후 아함카라는 근처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로 "이제 '나'는 이 황소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체험해서 알았으니 앞으로는 이 황소를 만나면 피해야지."라고 말할 것이다.
만물의 토대인 신은 만물 속에 두루 깃들이어 있는 실재다. 실재가 진정한 실재가 되려면 없는 곳이 없어야 한다. 감각이 있는 살아 있는 존재나 생명이 없는 사물에나 모두 깃들이어 있어야만 진정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이렇게 만물 속에 깃들이어 있는 참 나인 신을 아트만Atman 또는 푸루샤Purusha라고 한다. 파탄잘리는 푸루샤라는 말만 썼다. (푸루샤의 문자적인 뜻은 '몸 안에 거하는 神性'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푸루샤 대신 아트만을 쓰고자 한다. 그것은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가 아트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푸루샤보다는 아트만이라는 말에 훨씬 더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는 하나의 아트만이 만물 속에 깃들이어 있다[만물은 동일한 아트만의 나툼이다]고 가르친다. 파탄잘리는 상키야 철학을 따라, 모든 개체와 대상은 각자의 푸루샤를 가지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루샤는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각자의 푸루샤'와 관련된 '서로 다름'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는 영적인 구도자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마음은 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요가 철학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다. 아트만이 지성 그 자체이자 순수 의식이며, 마음은 아트만의 지성과 의식을 반영하는 거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에 지성과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을 실체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다. 지식과 인식은 마음 즉 거울 속을 지나가는 일종의 사고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앎은 객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구 심리학자들이 내성(內省) 또는 자기에 관한 앎이라고 부르는 것도 파탄잘리에 의하면 객관적인 앎이다. 마음은 '보는 자'(the seer)가 아니라 외부 세계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는 자'인 아트만은 알려지는 대상이 아니라 아는 주체이기 때문에 마음을 통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모든 인식 작용은 '내가 이것을 안다'는 식의 에고의식[我想]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에고이지 참 나인 아트만이 아니다. 에고의식[我想]은 마음이나 감각 등을 참 나와 동일시하는 데서 생긴다. 마음이나 감각을 참 자아인 아트만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구가 자신을 전기電氣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속에 텅스텐 필라멘트가 있는 서양 배처럼 생긴 유리로 된 작은 물건이 자신을 전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에고가 스스로를 참 나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전구가 전기는 아니다. 전구를 밝게 빛나게 하는 것은 전기다. 전구가 전기가 아닌 것처럼 모든 개별적인 존재와 사물이 아트만은 아니다. 하지만 전기가 전구를 밝게 빛나게 하는 것처럼 아트만은 모든 개체와 사물의 존재의 근원이다.
외부로부터 어떤 사건이나 사물이 감각에 의해 받아들여지면 마음속에서 생각이 일어난다. 에고의식은 그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즐거운 생각이 들면, 에고의식은 '나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반대로 즐겁지 않은 생각이 들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 이 그릇된 동일시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즐거운 생각이라 할지라도, 그런 일시적인 에고의 즐거움은 즐거움을 주는 대상에 집착하도록 만들어서 결국은 불행하게 될 가능성을 준비하는 것이다. 참 나인 아트만은 생각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영원히 순수하고 자유로운 깨달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참 나만이 참되고 불변하는 행복이 다. 개체로서의 '나'라는 에고의식[我想]이 있는 동안, 즉 생각의 흐름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안에는 결코 참 나를 알지 못한다. 참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생각의 흐름을 통제하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그릇된 에고의식을 깨뜨려 버려야 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요가란 고통과 만나는 접촉점을 부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석가들은 생각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호수의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 호수 표면에 거친 물결이 일면 호수 전체가 흙탕물이 되어 바닥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호수는 마음을 가리키고 호수 바닥은 아트만이다. 파탄잘리가 말하는 '생각의 흐름의 통제'는 일시적이거나 피상적인 것이 아니다. 요가의 수행이 '마음을 공백 상태로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마음을 공백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요가보다는 친구에게 쇠망치로 뒤통수를 힘껏 때려 달라고 부탁하는 편이 훨씬 쉽다. 자신에 대한 폭력을 통해서는 아무런 영적인 진보도 이룩하지 못한다. 생각의 흐름을 일으키는 육체의 기관을 때려부수는 것이 요가가 아니다. 우리는 생각의 흐름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릇된 동일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런 작업이 곧 요가다. 그래서 요가는 훨씬 더 어렵다. 그릇된 동일시에서 벗어나면 성격도 완전히 변한다. 성 바울의 말처럼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요가와 성격의 변화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앞서 예로 든 호수의 비유를 좀 더 발전시켜 보자. 파도는 호수 표면만 흔들어 놓는 것이 아니다. 쉬지 않고 출렁이는 물결은 호수 바닥에 모래나 자갈을 쌓아 놓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래밭이나 자갈 더미는 파도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생명력이 길다. 파도가 잔잔해져도 바닥의 모래밭이나 자갈 더미는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호수 바닥에 쌓여 있는 모래나 자갈은 잠재의식과 무의식 영역에 존재하는 잠재력, 가능성, 또는 어떻게 하려는 경향에 비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이것을 삼스카라(samskaras)라고 부른다. 삼스카라는 계속되는 생각의 흐름에 의해 쌓인다. 그리고 일단 삼스카라가 형성되면 삼스카라는 새로운 생각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삼스카라와 생각의 흐름은 이렇게 상호 상승 작용을 한다. 마음속에서 분노의 파도가 일면, 이 분노의 파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분노 삼스카라를 남긴다. 이렇게 형성된 분노 삼스카라는 어느 때이고 화를 터뜨릴 기회만 기다리고 있게 된다. 사람들은 분노 삼스카라를 많이 쌓아 놓고 있는 사람을 '성격이 못된 사람'이라고 부른다. 쌓아 놓은 삼스카라의 총체가 곧 우리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결의 흐름의 방향이 바뀌면 모래밭도 옮겨지거나 모양이 바뀐다. 마찬가지로 삼스카라도 마음속에 종류가 다른 생각의 흐름을 도입함으로써 바꿀 수가 있다.
요가와 서구 과학은 이 문제에 관해 서로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삼스카라는 이 생에서 모두 획득된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떤 성격적인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서구 과학은 타고나는 성격적인 경향을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요가 철학은 삼스카라를 전생前生에서 얻은, 즉 수많은 윤회의 삶을 거치면서 생각하고 행동한 결과로 쌓인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어느 것이 옳으냐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요가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출생은 한 개인의 영혼이 삼스카라의 힘에 의해 자신의 삼스카라와 비슷한 삼스카라를 가진 부모를 선택해 이 땅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며, 그래서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기질을 '유전적으로' 물려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요가를 갈망하는 사람은 자신의 삼스카라가 어디서 왔는지, 또는 자신의 삼스카라가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를 밝혀 내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고, 삼스카라를 변형시키거나 제거하는 데에만 힘을 쏟는다.
마음 상태가 아직 고차원적인 요가를 수행하기에는 적절치 못한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약하고 경직된 육체를 가지고 어려운 발레 동작을 하려고 하면 다치기 십상이다. 그런 사람들은 쉬운 동작부터 차근차근 연습해 나가야 한다. 마음이 산만한 사람은 마음의 작용을 쉬고 집중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게으르고 느슨한 성격의 소유자들에게서는 건설적인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활력은 있으나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새로운 삶의 형태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마음 상태가 어떠하든지 모든 사람은 수행을 통해 변할 수 있으며, 파탄잘리가 말하는 완전한 요가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파탄잘리는 이 구절에서 요가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명민한 수행자라면 이 한 구절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것은 나머지 경구들은 모두 이 구절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작용이 통제된다면 요가의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흔히 요가를 '결합'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결합하기 위해서는 결합하는 두 개체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요가의 경우 무엇과 무엇이 결합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요가를 (결합이라기 보다는) 요가 수행자의 체험을 뜻한다고 본다. 의식의 작용을 통제함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비일상적인 체험을 요가라고 부르는 것이다.
외부 세계는 전적으로 그대의 마음과 생각 여하에 달려 있다. 외적인 세계는 모두 그대의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그대의 가치관은 순식간에 변할 수 있다. 어제까지는 그렇게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던 여인이 오늘은 꼴도 보기 싫을 수도 있다. 이것은 그 여자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외부 세계를 향해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불평하거나 화를 내지는 않으리라.
1-3.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진정한 본성에 거한다.
마음의 호수가 잔잔해지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누구일 것인지를 알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이 아트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자신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독립된 개체라는 그릇된 믿음에 기초를 둔 개인적인 '인격' 내지는 '성격'이 사라진다. '아무개'라는 것은 겉옷이나 가면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포장에 지나지 않는다. 외적인 포장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둘러치든지 벗어 던지든지 할 수 있다. 외적인 포장을 벗어버리면 깨달음을 얻은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그대가 '보는 자'이다. 육체나 마음이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보 는 자' 또는 '아는 자'이다. 그대는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알고, 그대의 육체가 움직이는 것을 본다. '보는 자'인 그대는 이렇게 그대의 마음과 육체를 보고 있지만, 결코 보여지는 대상인 마음과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보고자 하는 '보는 자'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는 자'인 그대가 '보는 자'인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을까?
그대는 그대의 얼굴조차도 항상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보는 기관인 눈이 얼굴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얼굴은 보는 자 또는 주체이다.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 앞에서야 하는데, 거울에 비친 영상은 보는 자가 아니라 보여지는 대상이다. 만약 거울이 찌그러졌거나 더러워져 있다면 거울에 비친 얼굴은 찌그러지고 더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거울에 비친 얼굴이 찌그러지고 더럽다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거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거울에 비친 영상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울이 맑고 깨끗해야만 있는 그대로의 얼굴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정 한 그대인 '보는 자'는 거울 역할을 하는 그대의 마음에 반영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파도가 일고 있으면 진정한 그대인 '보는 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대의 참 나인 아트만을 보려면, 그대의 아트만을 비추는 거울인 그대의 마음이 완전히 잠잠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1-4. 다른 때 즉 요가 상태에 있지 아니한 경우에는, 생각의 흐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상태에 머무른다.
그대는 자신의 본질을 망각한 채 그대의 생각이나 육체를 그대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대가 '나는 남자다'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남성의 육체와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나는 교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대의 두뇌 속에 모아 놓은 지식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 엄마다'라고 말하거나 '누구 남편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키가 크다', '나는 키가 작다' 또는 '나는 흑인이다', '나는 백인이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자신의 피부색이나 육체의 형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와 이름은 동일한 에너지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파탄잘리 같은 요가 과학자들은 불변하는 의식 또는 참 나라는 공통의 토대 위에서 동일한 에너지가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현대의 과학자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1-5. 생각의 흐름은 다섯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고통스러운 것과 고통스럽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진다.
파탄잘리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은, 그 생각이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부터 고통스러운 것을 뜻하지 않는다. 파탄잘리는 무지를 증가시키고 무엇에 탐닉하여 스스로 굴레를 쓰는 결과를 낳는 생각을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통스럽지 않은' 생각의 흐름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더 큰 자유와 깨달음을 향해 몰고 가는 생각의 흐름은, 처음에는 고통스러울지 라도 실제로는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면, 탐욕은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이다. 욕심대로 만족을 누려 기쁨을 얻는다 해도, 탐욕의 대상에 탐닉하게 되고 더 큰 욕심을 불러 일으켜 스스로 굴레를 뒤집어쓰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정심은 '고통스럽지 않은' 생각의 흐름이다. 동정심이란 어떤 대상에 대해 마음 아파하는 이타적인 감정으로서 이기심의 굴레를 벗겨 준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그런 동정심과 자비는 우리를 깨달음과 자유의 길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아플지라도 고통스러운 생각은 아니다.
실제로 요가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흐름을 '고통스러운 것'과 '고통스럽지 않은 것'으로 나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모든 생각의 흐름이 일시에 통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고통스럽지 않은' 생각의 흐름을 일으킴으로써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을 잠재워야 한다. 분노, 욕망, 망상 등을 사랑, 관용, 진리에 대한 생각의 흐름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리하여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이 완전히 잠잠해져야만 다음 단계의 수행을 해 나갈 수 있다. 다음 단계의 수행이란, 고통스러운 생각의 흐름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 낸 고통스럽지 않은 생각의 흐름을 잠재우는 훈련을 말한다.
선하고 순수하고 진실한 생각의 흐름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잠재워야 한다는 말 이 서구식 도덕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 있으리라. 아무리 아름답고 고상하다 할지라도, 외적인 세계는 피상적이고 덧없는 것이다. 외적인 세계는 결코 근본 실재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외적인 세계의 내면을 통해서 아트만을 깨달을 수 있다.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좋고, 착취하는 것보다는 나누는 것이 좋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것보다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확실히 더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덕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의 흐름 역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는 마찬가지이다. 개혁 운동이나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불철주야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뭇사람의 존경을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고요하지 못 하다. 열망으로 들끓고 있는 그들의 마음에는 휴식이 없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마음은 고요하다. 그들의 마음이 고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만물 속에, 심지어는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싸움과 투쟁이 그치지 않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 내면에는 아트만의 평화가 깃들이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고요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고통스러운 것'과 '즐거운 것'으로 나누지 않은 것에 주목하라. 소위 즐거운 생각조차도 궁극적으로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어떤 생각은 고통스럽게 시작되지만 평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어떤 생각은 즐겁게 시작되지만 고통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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