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서당
중요민속자료(제171호)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
이 건물은 조선 중기 문신 성이성이 살던집으로 광해군 5년(1613)에 건립하였다. 성이성은 인조 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부사등고을 수령과 어사에 여러 번 등용되었으며 근검과 청빈으로 이름이 높았다. 집의 구조는 정면 7칸, 측면6칸의 ㅁ자형으로
되어 있으며 팔작 지붕의 사랑채와 중문간으로 연이어져 있다. -출처-- 봉화군청
계서당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춘향전'과 관련이 깊습니다.
"성춘향과 이도령은 실존인물이었다"의 요지
성춘향과 이몽룡. <춘향전>의 두 주인공은 여지껏 이런 이름으로 알려져 왔지만. '이도령(李道令)으로 알려져 왔으나 ‘성도령(成道令)’으로 바꿔 불러야 할 판이다.(춘향의 성은 본디 무었이었는지 정확치 않다).
' 이도령의 본래 이름은 성이성(成以性: 1595∼1664), 조선조 광해군 ·인조 때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남원에 머무르는 동안 기생을 사귀었고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찾았다. 성이성은 다시 옛 연인을 만나보려 했지만 사랑하던 그 기생은 죽고 없었다.'
한국 최고의 로맨스이자 4대 국문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춘향전>의 탄생비밀이 최근 한 국문학자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밝혀졌다.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춘향전 비교연구> 등 굵직굵직한 저서를 내놓으며 지난 30년 동안 <춘향전> 연구에 괄목할 성과를 일궈온 설성경 교수에 의해 근 3백년간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던 이른바 '춘향전 신화'의 본디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설 교수는 오랫동안 <춘향전>이야기 '역사적 실체'가 숨어 있을 것으로 가정하고 이를 밝히는 데 몰두해 왔다. 그는 최근 자신의 '가정'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자료를 손에 넣었다. 성이성 본인의 일기 따위를 후손이 편집해낸 <계서선생일고(溪西先生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성 섭(成涉 : 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가 그것이다. <춘향전>의 두 주인공 성춘향과 이도령의 실존 인물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사료는 물론 민간에서 구전된 설화와도 면밀히 대조·분석해 내린 결론이다.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길에 길을 나서서 십 리가 채 안 되어 남원 땅이었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부릅뜨고 (원천부내로) 들어갔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도다. 거푸 소년 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원문 생략)
이 구절은 이도령의 실제 인물로 추정되는 성이성 본인의 기록 '호남암행록'(<계서선생일고>에 실려 있음)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설교수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늙은 기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밤잠을 설쳐가며 소년 시절을 회상했다'는 성이성의 진술. 설 교수는 "비록 성이성이 직접 옛 연인(또는 춘향)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앞 뒤 정황으로 보아 틀림없이 옛 연인을 그리워한 대목이라고 판단된다"라고 말한다.
설 교수에 따르면, 옛 연인(또는 춘향)은 기생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중에서도 관기(官妓)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옛연인(또는 춘향)이 성이성과 이별한 뒤 연정을 지키려다가 사적인 행동이 용납되지 않는 관기(官妓) 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실제 인물 성이성의 행적과 <춘향전>주인공 이도령과의 밀접한 관계는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 그대로 유입된 <필원산어>의 한 대목에 의해 더 구체적으로 뒷받침된다. 성 섭은 성이성의 4대손이며, 홍문관 교리·암행어사를 지낸 성기인(成起寅)의 아들이다. 성 섭은 <필원산어>에서 자신의 고조(성이성)가 남원 땅에서 행한 '암행어사 출두사건'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리 고조가 암행어사로 호남에 갔을 때 암행하여 한곳에 이르니 호남 열두 읍의 수령들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한낮에 암행어사가 걸인 모양으로 음식을 청하니 ... 관리들이 말하기를 ‘객이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이 자리에 종일 있으면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어도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속히 돌아감만 못하리라’... 곧 한 장의 종이를 청하여 시를 써주었다. ‘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소반위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불 눈물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진다.’ 쓰기를 마치고 내놓으니. 여러 관리들이 돌려가며 보고는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들어 갔다. 여러 관리들은 일시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
<필원산어>에 나오는 이 대목은 <춘향전>의 암행어사 출두장면과 다름이 없다. 특히 성이성이 여러 관리에게 보여준 한시(漢詩) 구절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내보인 한시 구절과 정확히 일치한다.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그것이 판소리 계열의 <춘향가>든, 소설계열의 <춘향전>이든 예외없이 실려 있는데, 이 중 한 대목 '술독에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라는 시구는 성이성이 지은 한시 내용 그대로인 것이다.(원문은 '金樽美酒千人血/ 玉盤嘉肴萬姓膏/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로 되어 있음).
이쯤 되면 기왕의 <춘향전>은 형성요소의 절반이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춘향전>의 실제 모델을 밝히려는 노력이 과거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춘향전>발생(기원)을 해명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가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이성은 일찌감치 60년대에 '1대 춘향전 연구가'이자 설성경 교수의 스승이던 나손 김동욱 교수(작고)에 의해, 조선조 말 동시대인으로서 저마다 암행어사로 유명했던 노진·박문수·김우항 등과 함께 '실제 모델'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이다.
당시 김 교수는 성이성 관련 설화에 '춘향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설교수는 '미완의 연구'로 끝난 이 부분에 새로 발굴한 사료와 남원일대에 흩어져 있는 각종 고사와 춘향설화를 있대어 새로운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설 교수는 이같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춘향전>발생 시나리오를 다시 짜맞추고 있다. <춘향전> 발생 경로와 관련하여 기존 학계에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설득력을 얻어 왔다.
하
나는 <춘향전>이 무속(특히 무가)에서 발생해 진화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판소리를 통해 발생·진화했다는 것이다.
설 교수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내세운다. 즉, <춘향전>은 성이성 등 실존 인물의 '역사적 사실'을 절반으로 하고
각종 고사·설화 등 '허구'를 절반으로 하여 한 '유능한' 작가의 창작에 의해 최초의 텍스트가 성립된 이후, 각양·각층의 민중
참여(첨삭)를 통해 오늘날의 <춘향전>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출처-- 봉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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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4일(토) 저녁 7시에 이 계서당에서 야간 고가 음악회를 합니다.
결혼식 전야제가 되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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